

모토엘라스티코에서의 회의가 끝나니
6시가 미처 못 된 시각에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친 셈이 되었다.
우리는 출출한 배도 채울 겸 광장시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는 역시 막걸리가 제격이다.
두툼한 순대와 쫀득한 돼지 족발 안주와 함께 분위기가 무르익자
구룡이 본격적인 말문을 연다.
비엔날레 도록 회의를 위해 한주간 파트별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 다양한 공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마다 느끼는 바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부끄러움과 자기 반성에 대한 점은 우리 셋에게 모두 공통적이었다.
조병수 선생님과 세계적인 건축가들로부터 배운 디자이너의 작업에 대한 겸허하면서도 열정적인 '태도'와
김영일 선생님의 자기 꿈에 대한 소신있는 추진력과 분명한 '태도',
모토엘라스티코의 새로운 시각과 창의적 실천,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통해 깨닫는 부끄러움과 자기 반성에 이어
구룡에게는 특별히 이를 넘어선 '대각성(大覺醒)'의 순간이 열린 모양이었다.
한번 깨달음의 눈이 열리면 수많은 것들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하는 법.
오늘 오전 시니어 라이프와의 회의 중에 일어난 동시다발적인 순간에서의
왕정민씨의 작은 행동을 통해 그는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느낀 듯 그 말을 하고 또 한다.
회의 중에 온 전화에 답하기 위해 내가 비엔날레 사무실의 다용도실 겸 화장실로 잠시 자리를 피해 통화를 하는데
이 모습을 놓치지 않고 정민씨가 슬그머니 화장실의 불을 켜주었다.
아무에게도 아무런 생각을 일으킬 일이 결코 아닐 수 있었음에도
'눈이 열린' 구룡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큰 배움의 기회가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 저녁 내내 여형과 나는 구룡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스무 번도 더 듣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이 구룡에게 그토록 깊은 깨달음과 감동을 줄 수 있었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리가 애용하는 성대입구의 주점 '이씨네' 주인장과의 얼마 전 대화가
그에게 대각성의 첫 망치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내친 김에 자리를 옮겨 '이씨네'를 찾았다.
(시간은 아직 8시도 안되었다..!)
이씨네의 명품 안주 '초절임 고등어'는 언제 먹어도 정말 변함없는 명품이다.
주종은 역시 막걸리로, 구룡의 대각성의 스토리는 이어진다.
얼마 전 이씨네에서의 술자리에서 이씨네 주인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구룡의 해박다식한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이를 한참 듣던 주인장의 말씀-
"그래서, 네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뭔데..?"
순간 그의 한 마디는 이십 칠팔년간을 의지해 왔던 구룡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그......... 모르겠습니다."
하하..
이 순간 이후로 구룡에게는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무수한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모르겠어도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이 그를 온통 사로 잡은 것이다..
(결국 여형과 나, 그리고 이씨네 주인장까지.. 우리는 저녁 내내 구룡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스무 번도 더 듣게 된다..)




장마라고는 하나 예전과는 전혀 다른 패턴의 오락가락하는 비는 저녁 늦은 시간 엄청나게 퍼부어댔고
구룡의 대각성의 순간에 더할 나위 없는 감동을 보태주었다.
꽃의 개화의 순간을 목격한 듯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감동도 더할 나위 없다.
위대한 누군가의 생각으로 나의 생각을 대변하는 일은
나의 머리를 잠시 든든하게 할 수는 있겠으나
나의 눈과 나의 귀, 나의 가슴을 대신 열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위대한 생각들로 점철된 나의 '앎'이
나의 존재를 설명해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 선택의 여지는 없다.
한없이 부족하고 한없이 가벼운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반성을 토대로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소백산 봉철스님의 가르침이 나의 뒷통수를 호되게 내리친다.
'안다는 것(앎)은 오직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다..'